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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 「식탁」
우리 집에는 식탁이 없다. 식탁 없는 집이라는 건, 저녁이 되어도 마주앉지 않는 식구들이라는 뜻이다. 할머니는 거실에 놓인 일인용 탁자에서, 엄마는 안방 침대에서, 나는 내 방 책상에서, 우린 각기 다른 시간에 일 인분의 저녁상을 차린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우리 식구는 나, 엄마, 아빠에서 나, 엄마, 할머니가 되었다. 옛날에 엄마가 고등학생 때까지 할머니가 계모인 줄 알았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내 눈에도 엄마와 할머니는 신기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없는 모녀다. 엄마는 할머니가 걸레와 수건을 한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것도, 음식 묻은 손으로 리모컨이며 냉장고 손잡이를 만지는 것도, 먹고 남은 음식들을 죄 한데 모아 보관하는 것도, 겪을 때마다 그런 일들을 난생 처음 겪는 사람처럼 질색하며 못 견뎌 했다. “아, 엄마! 설거지 하지 말라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부아를 낸다. 할머니가 또 설거지거리에 손을 댄 모양이다. 소파에 앉아 일일드라마를 보던 할머니는 남의 일인 양 부엌 쪽을 흘긋 볼뿐 대답이 없다. 엄마는 찬장에서 갈린 과일 찌꺼기가 눌어붙은 컵과 기름때가 지워지다 만 그릇들을 도로 꺼내 큰소리가 나도록 싱크대에 넣고는, 앉은뱅이 소반에 저녁상을 차려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설거지 금지령’을 내린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면 지저분해서 꼭 두 번씩 손이 간다는 게 이유였다. 처음에는 별난 년 다 봤다며 못 들은 체하던 할머니도 엄마의 강경한 태도에 끝내 두 손을 들었다. 할머니가 마지못해 “안 한다, 안 해” 하고 승복하면서, 모녀의 설거지 논쟁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설거지 조약’ 일주일 만에 태연히 다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수년째, 엄마는 할머니가 씻어 놓은 그릇들을 볼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고, 할머니는 그 불같은 성미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며칠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릇들을 씻어 놓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얼마 전 일요일 오후였다. 평소처럼 부엌에서 “설거지 하지 말라니까!” 소리치는 엄마에게, 웬일인지 할머니도 왈칵 성을 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야! 나쁜 기집애들.” 할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집애‘들’이라는 말은 관중석에 앉아있던 나까지 일으켜 세웠다. 쌓여있던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말들을 골라 주고받았다. 허공에서 말들이 뒤엉켜 서로를 할퀴고 때렸다. 아차, 하는 생각이 제동을 걸었을 땐 이미 세 사람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소리 내어 울었고, 엄마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 벌게진 눈으로 돌아왔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것은 세 모녀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었다. 며칠 간 냉랭한 기류가 이어졌다. 밥을 구실로 꾸역꾸역 마주앉을 일 같은 것도 없으니,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긴 침묵이 깨진 건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말을 꺼냈다. “아빠 보러 가자.” 할머니는 무심한 척 반색했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충청북도 산골의 어느 사찰로 향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모신 곳이었다. 가는 길에 엄마가 만든 유부초밥과 할머니가 깎아온 과일을 나누어 먹고, 내가 내려온 커피를 마셨다. 할머니가 휴대폰으로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의 노래를 틀었다. 엄마도 나도 아는 가요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우리는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소리치고 서로 헐뜯었던 게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린 오래된 나무 앞에 섰을 때, 할머니가 말했다. “안 그래도 너희 아버지 보고 싶었는데, 고맙다.”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나무 밑동만 바라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모르는 사이 할머니는 노인회관 컴퓨터 교실에서 가장 높은 반으로 진급했고, 엄마는 아침 명상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수영 강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셋이 모여 서로의 일상을 묻는 게 얼마 만일까, 그런 적이 있기는 했던가, 생각했다. 절에 다녀온 다음날 오후, 엄마가 불쑥 거실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식탁 시켰어. 저기 두려고.” 할머니는 잠시 엄마를 바라보다 말했다. “잘했네.” 나는 엄마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창문 옆 널찍하게 비어있는 공간. 거기에 식탁을 두고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세 사람을 그려 보았다. 늘 기분 좋은 대화만 오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식탁엔 못마땅한 한숨과 날 선 말들, 벗어나고 싶은 순간들이 오르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저녁 서로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삼 인분의 저녁상을 차려낼 것이다. “무슨 색인데? 사진 봐봐.” 엄마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내가 말했다. 식탁이 놓일 자리 위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거짓말로 이어진 우정」
“아빠가 친한 친구가 있는데, 한 번 만나 볼래?” 아빠가 나한테 친구를 소개해준 적은 없었다. 내가 아빠한테 내 친구를 소개한 거면 몰라도.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친구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아빠가 선뜻 내게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니. 그 분은 어떤 분이실까? 아빠처럼 식당을 운영하는 분일까? 그 분에게도 내 또래의 자녀분이 계실까? 딸일까, 아들일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아빠 친구는 식당을 운영하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아 내 또래의 딸이나 아들이 있지도 않았다. 아빠의 식당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서로 어색해 했다. 아빠가 삼촌에게 나를 소개했다. “얘는 내 딸이야.” 삼촌은 대답이 없었다. 그때 식당 손님께서 아빠를 찾으셨고, 아빠가 자리를 떠나자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속으로 아빠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그때, 삼촌이 처음 입을 열었다. “조카는 몇 살이야?” “네? 스물두 살이요.” “나는 오십 살이나 먹었대, 형이.” 어눌하고 떠듬떠듬한 말투였다. 삼촌은 ‘오십 살’이라고 말할 때,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전부 펼쳐 숫자 ‘5’를 강조했다. 동시에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삼촌과의 첫 만남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곧 삼촌의 화법에 익숙해져 갔다. 짧게 자른 머리,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삼촌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아빠는 그런 삼촌과 10년을 함께 했다. 10년 전에 아빠는 마트를 했었는데, 마트 건너편에는 치킨집이 하나 있었다. 그때 치킨집 사장님의 아들이 삼촌이었다. 삼촌은 삼촌의 엄마 다음으로 우리 아빠를 가장 좋아했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출근부터 퇴근까지 삼촌이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처음에 아빠는 이런 삼촌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삼촌으로부터 많은 힘을 얻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과 요즘 같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촌은 조금이라도 궁금한 게 생기면, 아빠가 설거지를 하든, 오후 타임 식재료를 준비할 때든 질문 공세를 날리곤 했다. “형, 구름은 왜 움직이는 거야?” “강아지도 엄마가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 가볍고 사소한 질문부터 무거운 질문까지 질문의 내용은 정말 다양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곤란해 하거나 귀찮은 기색 없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대답해주었다. “구름은 바람이 불면 움직여.” “강아지도 성수처럼 당연히 엄마가 있지.” “죽으면 하늘나라로 가. 다른 세계로 가는 거야.”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삼촌의 질문에, ‘하늘나라로 간다’고 한 아빠의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작년 가을에 삼촌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혹여나 삼촌이, ‘죽으면 하늘로 간다면서, 왜 우리 엄마는 하늘에 안 보여?’와 같은 질문을 할까 조마조마했다. 만약 삼촌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삼촌의 질문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유튜브 찍으면 하늘나라에서도 볼 수 있어?” “네? 유튜브요?” 순간 당황한 나는 오히려 되물었고, 삼촌은 놀란 토끼 눈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형이 하늘나라에도 티브이가 있대.” “아빠가 그랬어요? 티브이가 있다고?” “응. 그래서 엄마도 거기서 드라마 볼 수 있대. 진짜로!” 삼촌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이. 나는 그때 삼촌의 커다란 눈망울과, 식당 주변의 여름나무들이 선선한 바람에 흔들렸던 것, 삼촌이 내게 보여준 휴대폰 배경화면 속 화려한 머리를 한 삼촌의 어머니 얼굴까지 전부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나는 이전에 아빠에게 따지듯 물었던 적이 있었다. 삼촌도 엄연한 어른인데, 왜 자꾸 그런 거짓말을 하냐고. 삼촌이 장애인이라서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아빠는 내게 진지한 얼굴로 “너는 가족을 잃어본 적이 있어?” 라고 물었다. 나는 아빠의 묵직한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가 삼촌에게 거짓말하는 게 정당화될 순 없었다. “가족을 잃어본 적은 없지. 얼마나 슬픈지도 모르고. 근데 그렇다고 거짓말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나중에 진실을 알면 삼촌이 엄청 슬퍼할 수도 있어.” 내 말에 아빠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다 곧, 삼촌의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빠의 말은 이러했다. 삼촌에겐 가족이 어머니와 남동생 뿐이었는데,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결혼 후 삼촌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렇게 삼촌은 세상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이후 아빠는 삼촌을 식당 직원으로 고용해 급여를 챙겨주고 매 끼니마다 함께 식사하며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아빠가 삼촌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이런 인연을 이어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단순한 생각은, 아빠와 삼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과정 속에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식당 마감 시간이었다. 아직 하늘이 푸르렀고 하얀 구름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와 삼촌,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식당 앞 파라솔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때 삼촌이 말했다. “형. 엄마가 하늘에서 나 보고 싶어 해. 꿈에서 그랬어. 나 유튜브 찍으면 엄마가 볼 수 있어?” “당연하지. 티브이로 연결해서 보면 되지. 저기 서 봐. 내가 찍어줄게.” 그러자 삼촌은 부끄럽다고,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미는 아빠를 피해 다녔다. 우리 셋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나는 비록 거짓말로 이어졌지만, 아빠와 삼촌이 단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아빠는 아빠만의 방식으로 삼촌의 세계를, 삼촌은 삼촌만의 방식으로 아빠의 세계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순수함의 세계. 삶의 단짝이란 무엇일까. 서로의 세계를 이어주는 지켜주는 게 진정한 단짝의 정의가 아닐까? 나는 아빠와 삼촌의 우정을, 그들의 세계를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반가워요 HO SOOK씨」
나는 종종 어른들도 감정을 가진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아니 그 사실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 사천 할머니께 전화드렸어? 뭐 따로 하신 말씀은 없고? - 엉 전화드렸어, 늘 똑같지... 늙으면 죽어야 한다 뭐 그런 말씀. - 아이고... 과일이라도 보내드려야겠네. 상주 외할머니랑은 통화됐고? - 외할머니는 이번에도 전화를 안 받으셔. 알잖아. - 느이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전화해도 한번에 안 받으실 거야. 모녀의 통화는 양가 할머니들의 선명한 대비로 인한 웃음으로 끝난다. 전화를 이렇게나 안 받는 분은 서호숙 씨다. 서호숙 씨는 나의 엄마의 엄마로, 경상북도 상주 시에 살고 있다. 과수원과 외양간을 운영하면서 김 씨네 맏며느리 역할까지 수십 년간 유려하게, 춤추듯이 해낸 분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 과수원을 정리하고 외양간도 아들에게 넘겼지만, 호숙 씨의 하루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간다. 친구네 과수원 일도 도와야 하고, 일이 끝나면 밥도 차려 먹어야 하고, 믹스커피 한잔의 여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누가 화투판이라도 벌이면 빠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자연히 전화기에는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하루에 12시간에 육박하는 손녀를 호숙 씨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호숙 씨는 굉장히 ‘쿨’한 면이 있다. 그는 시원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 손녀가 운전면허 시험 중 도로 주행을 두 번 연속 낙방했다고 투정 부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호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예순 먹은 할머니도 땄는데 뭔 엄살이고.” 맞다. 남편이 사고로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녀야 했을 때, 호숙 씨는 매번 택시를 부르거나 자식들에게 전화하는 것이 불편하고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숙 씨는 면허를 따기로 했다. 필기시험을 컴퓨터로 봐야 했던 것이 제일 큰 난관이라고 했다. “아니 문제를 다 풀었는데, 확인 그거를 안 눌러서 입력이 안 됐잖어. 내가 어찌 아냐 그거를?” 호숙 씨는 그렇게 필기에 낙방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재응시해 당당하게 합격했고, 기능 시험과 도로 주행까지 파죽지세로 해냈다. 오토바이와 트럭을 오가며 상주 시를 누비는 호숙 씨는 도로 주행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 손녀를 이해할 수 없다. 호숙 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 운전면허를 따지 못한다고 구박하는 손녀딸이 바로 나다. 그러나 나는 호숙 씨의 그런 모습들이 싫지 않다. 호숙 씨에게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호숙 씨가 나에게 무얼 바라지 않는다는 적정한 거리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숙 씨의 딸, 즉 나의 엄마와 외가 사촌들이 함께 유럽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당연하게도 호숙씨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할머니는 바쁘고, 유럽까지 가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야.’ 우리가 호숙 씨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조심스럽게 “내가 가면 애들이 많이 힘들란가?” 라고 물어봤을 때였다. 호숙 씨의 딸들은 머리가 띵했다. 우리는 호숙 씨를 얼마나 모르고 있던가. 호숙 씨에게 묘한 미안함을 느끼며 우리는 다 같이 스페인으로 향했다. 비행기 탑승 전, 미연에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모두의 여권을 걷었다. 여권 사진 속 호숙 씨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표정이었지만, 앙 다문 입꼬리에서는 긴장감이, 살짝 올라간 눈썹에서는 설렘이 엿보였다. 사진 옆에 영문으로 쓰여 있는 ‘SEO HO SOOK’을 낯설다고 느꼈다. ‘할머니’가 아닌 ‘서호숙’ 씨를 나는 처음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HO SOOK 씨. 반갑습니다. 호숙 씨는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평소와 같이 무던했고, ‘할머니 좋으세요?’ 물어보면 ‘좋지.’라고 대답하는 정도였다. 나는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 들어 서운하기도 했다. 옆에서 매사에 즐거워하고 있는 우리에 비해 호숙 씨는 여행을 그다지 즐기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호숙 씨는 가이드의 설명을 제일 앞줄에서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손녀 딸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요즘 애들’의 사진 포즈를 재빨리 흡수하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찍자고 하면 쑥스러워 하다가도 눈부신 건치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건축물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길가에 핀 꽃과 가로수에 열린 오렌지에 눈이 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호숙 씨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눈빛으로 기분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서운한 마음은 사라졌고, 호숙 씨의 눈이 ‘반짝’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포착하고 싶어졌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호숙 씨와 함께 몬세라트 산맥을 걸었다. 여행 내내 호숙 씨의 기분은 어떨까 고민했다. 투어 버스의 창에 기대 풍경을 바라보는 호숙 씨의 얼굴은 노을빛을 받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표정의 깊이는 내가 평생을 들여도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 같았다. 그러나 호숙 씨와 함께 걷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호숙 씨는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동일한 마음의 지평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행이 끝나고, 호숙 씨는 상주로,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유럽 여행의 사진들을 모아서 디지털 앨범에 넣어 드렸다. 동네 어르신들이 놀러 오시면 실컷 자랑하라고 터치도 되는 모델로 준비했다. 호숙 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매사에 큰 감흥 없는 나의 쿨한 할머니로 돌아와서, 디지털 앨범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밤중 목이 말라 거실로 나와 본 나는 알고 있다. 사실은 호숙 씨도 그 앨범 속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는 것을. 몬세라트 산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와 할머니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곤 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 아마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음을 지닌 우리가 공명하는 귀한 시간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 순간 귀에 울리는 ‘댕-’ 소리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가족임을 떠올린다.
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J」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J와 나는 아주 작고 유약했다. 겨우 아홉 살,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이. 우리는 각자 엄마와 아빠의 손을 꽉 부여잡은 채 영화관 로비에서 처음 만났다. J를 처음 본 순간은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래보다 유난히 작고 깡말랐던,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짤막하게 자른 여자아이. 까무잡잡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옷을 입고 있던. 어설프고 겁 많은 그 애의 표정 탓이었을까, 나는 그 애보단 내가 족히 한두 살 정도는 언니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애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엄마에게서 어렴풋이, 우리가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엄마와 아저씨는 재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딸을 두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꽤 빠르게 살림을 합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이십 대의 뜨거운 사랑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며칠에 한 번, 엄마의 데이트 날에만 볼 수 있었던 J와 이제는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기만 했다. 그건 J도 마찬가지였다. J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우리는 그때부터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 우리를 향해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마구 던져댔다. “있잖아, 너네는 자매인데 왜 성이 달라? 무슨 사이야?” 그 질문을 받을 때면 우리는 매번 말문이 막혔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같이 사는 걸 알았고, 쌍둥이라고 하기에는 생일도 얼굴도 달랐고, 자매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같았다. 어떤 단어로도 우리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사촌지간이지만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는 변명을 생각해냈고, 그 변명을 비장의 카드처럼 써먹었다. 적어도 그 변명에는 이상하다, 가 아닌 신기하다, 라는 표정이 따라붙었으니까. 사춘기가 찾아오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나눌 시기가 되자, 우리는 자주 다퉜다. 다른 자매들이 그렇듯 대개는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이유였다. 때로는 더 예쁜 딸이 되고 싶어 엄마 앞에서 서로의 약점을 공격했고, 그런 날이면 라면을 끓여 먹거나 치킨을 뜯으며 화해의 심정을 나눴다. 또 어떨 때는 질투심 많은 베프가 되기도 했다. 나나 J에게 서로 더 친한 친구가 생기면 대놓고 질투를 한다는 점에서 마치 단짝을 뺏긴 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최고의 자매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친구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J가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고는 한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면 늘 과거가 아닌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J와 나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기에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비록 남들과 같은 정상 가족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함께하게 된 것은 인연이자 운명이라고 말하며 서로를 토닥여 주는 무수한 밤들이 있었다. 우리는 훗날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J야, 우리 스무 살이 되면 둘이서만 따로 나가 살까?” “좋아. 요리는 내가 할 테니까 청소는 네가 하면 되겠다.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고.” 하지만 J와 만나지 못한 지도 벌써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엄마와 아저씨가 십 년이라는 세월을 뒤로한 채 이별을 맞이한 탓이었다. 사실 그렇게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남녀 사이가 그렇듯 만남이 있으니 이별도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도, 그리고 아저씨도 우리의 사이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 이후로 J와 연락하지 않은 것은 엄마에 대한 미안함, 오직 그것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J와 나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격은 아주 달랐지만 마음만은 늘 같았다. J는 세심하고 나는 당차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는 J만 내 곁에 있다면 친구 정도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건 J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J는 나의 첫 단어 같은 존재였다. “있잖아, 너는 계속 글을 쓸 거지?” “당연하지.” “그래. 그럼 난 취업을 할 테니까, 너는 꼭 대학에 들어가서 글 열심히 써. 내가 첫 월급 타면 꼭 네 노트북부터 사줄게.” J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지금도 J가 많이 그립지만 아직은 J에게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 인생의 최고의 단짝, J야. 언젠가 내가 정말 커다란 용기를 얻게 된다면 가장 먼저 너에게 연락을 보낼게. 그때까지 꼭 건강해야 해.
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저는 반찬가게 아들입니다」
엄마가 반찬 가게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을까요?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명절마다 가게 일을 돕느라고 연휴 때 친구들과 놀지도 못한다 투정을 부린 기억이 나니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엄마가 가게를 처음 시작하고 맞은 명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설이었나 추석이었나 이젠 가물 가물 하지만 제가 동생과 함께 방을 쓰던 그 집에서 산적 꼬치를 끼운다고 가족이 다 같이 좌탁에 둘러앉아 저마다 쟁반을 채우던 모습이요.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가족의 차례니 제사 뿐 아니라 온 동네의 차례와 제사를 책임지는 셈이었죠. 그 즈음 우리 집 냉장고엔 우리 가족 먹을 반찬이 아니라 다른 집 차례에 오를 산적 꼬치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죠. 그때 참 어렸던 아이는 설이며 추석, 가끔은 정월대보름까지 가게에 나와 "땡꼬포오새(동그랑땡, 산적 꼬치, 명태포 전, 오징어튀김, 새우튀김) 사세요" 를 외치며 시장 상인들에게 예쁨을 받았어요. 엄마 가게의 냉장고에는 [땡10,000 꼬15,000 포30,000 오10,000 새20,000] 이렇게 적힌 주문 쪽지들이 가득 붙어있었고, 저는 그 주문에 따라 소쿠리에 가득 담겨있는 튀김이며 전을 밤새 포장했어요. 엄마한테 이거 다 팔면 집에 가느냐고 물어보면 "아직 집이랑 가게 냉장고에 꼬치랑 고구마, 명태포 더 튀길 거 한참이나 있다" 라고 알려주셨죠. 전날 밤부터 낮까지 엄마는 전을 부치고 할머니는 튀김을 튀기고 저는 계속 손님들 주문을 받았죠. 명절 전날까지 제사음식을 팔다가 장사를 접으면 엄마와 나, 외할머니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갔죠. 다들 튀김이랑 전 때문에 기름 냄새는 맡기도 싫다며 연휴에 여는 가게는 삼겹살집뿐이라 고기를 먹고 집에 갔어요. 명절 연휴에는 여행이나 귀향 길에 오르는 다른 집들과 달리 우리는 방바닥에 다들 누워 지루한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엄마랑 나는 이제 질려서 쳐다 보지 않는 튀김, 전을 부엌을 오고 다니던 아빠와 동생이 집어먹는 모습이 반찬 가게 아들내미 가족의 명절이었죠. 사실 그런 명절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던 날은 정월대보름이었어요. 할머니께서 한 솥 삶으신 시금치에서는 김이 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빨리 나물은 식혀 둬야 한다고 할머니는 그 뜨거운 나물에 맨손을 넣으시고 휘 저어 김을 빼셨어요. 그때 가게가 참 예뻤어요 시금치, 콩나물, 무생채를 스티로폼 용기에 담으면 녹색, 노란색 그리고 흰색이 조화롭게 담긴 한 그릇이 나오는데, 가게 앞에 줄지어 놓인 나물들의 색감이 지금도 선명해요. 아, 왜 보름이 좋았나 생각해보니 그 날은 쉬는 날이 아니라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왔기 때문인가 봐요. 그러면 가게 안에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있는 나물들의 향연을 보았고 찰밥에 원하는 나물들을 덜어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씀씀한데 오묘한 고소한 맛이 나는 취나물과 아주까리부터, 들깻가루에 무쳐 향이 좋은 꼬들꼬들한 토란대를 실컷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러다 토란대를 너무 많이 먹어 목이 까끌까끌해서 혼이 났던 기억도 나네요. 그땐 나도 참 어렸는데, 물론 지금도 다 컸다고 얘기할 순 없겠지만요. 요즘은 그게 고민인 것 같아요. 어떻게 되면, 언제가 되면 내가 다 컸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엄마는 새벽이면 일어나 농수산물시장 업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물건을 받고 현대 포터 용달차를 타고 가게 셔터 문을 올리겠죠. 그러면서도 스무네 해 동안 엄마는 나한테 참 많이 기대 왔다고 이야기했어요.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오히려 엄마 반찬을 더 자주 먹게 되는 것 같아요. 저번에 보내주신 열무김치는 혼자서 다 해치울 수 없는 양이어서 친구들과 조금씩 나눠 먹었더니 택배 주문은 안 받느냐고 주변에서 난리입니다. 봄이 오면 달래 무침을 보내주시고, 가끔 나 좋아하던 고사리는 잊지 않고 넣어주시고, 지난번 집에 갔을 땐 "이거 엄마 어릴 때 먹던 건데 시장 가니 있더라" 며 쑥부쟁이를 무쳐 주셨죠. 생긴 건 쑥과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 쑥 맛이 나는데 콩비지랑 같이 먹어도 맛있겠다 생각했어요. 이럴 때마다 하여간 아들을 나물 박사로 키우시려는 셈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제 또래에 이렇게 다양한 나물 맛을 알아가며 살 수 있는 것은 복 받은 일이라 생각해요. 어릴 땐 다들 이렇게 사나 보다 당연하다 여겼을 법한 일들이 크고 나서야 우리만 아는 사실임이 밝혀졌을 때 놀라기도 해요. '고들빼기로 김치를 담근다는 사실'과 '음력 9월 9일엔 구구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동시에 아는 집은 많지 않을 거예요. 이건 다 전라도에서 내내 사셨던 외할머니와, 전라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가게를 차린 엄마와 함께 일을 도왔기 때문이겠지요. 개중 '밤국'은 정말로 아는 사람이 없는가 봐요?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나오지 않고 주변에도 밤죽이나 밤묵은 알아도 밤국은 정말 처음 듣는다는 눈치더군요.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쓰는 게 세상에 밤국을 처음 알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군요. 단팥이며 밤이며 달달한 재료는 다 들어가 국처럼 쑨 밤국은 물김치나 담던 큰 김치통에 넣어두고 절대 숟가락으로 바로 먹는 게 아니라 국자로 덜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안 그럼 빨리 쉰다고요. 마음 같아선 한 번에 다 먹을 자신 있으니 숟가락을 바로 집어넣고 싶지만 퇴근한 아빠도 맛 보여드려야 하고 내일 아침 대신으로도 먹어야 한다니 참아야지요. 사실 이렇게 말해도 밤국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에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건가 봐요. 세상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저만의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이요. 이젠 예전처럼 어린아이 손 같은 고사리가 아니라 야산에 제멋대로 자란 고사리처럼 이리저리 치여 억세게 자라 버린 저지만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밤국의 맛을 알아가며 산다는 것', 그리고 '어릴 적 가족과 다 같이 온 동네 산적 꼬치를 끼우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튀김을 팔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이 결국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주는 출처이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이해받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족으로 탄탄히 묶여있는 건가 봐요. 어머니, 그래서 저는 반찬 가게 아들입니다.
2023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구루마」
남서쪽을 향하고 있는 창문, 목조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화장품, 저녁으로 만들어서 먹었던 두부조림의 냄새. 8평 남짓한 나의 공간은 그야말로 축사에 가까웠다. 가끔 경주에서 올라온 엄마는 돼지가 사는 건지 사람이 사는 건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머쓱하게 널브러진 화장품을 주워, 눈에 보이는 수납함에 넣거나 발로 바닥에 있는 물건을 밀어냈다. 하지만 항상 제자리를 번듯하게 지키고 있는 게 있다면 바로 ‘구루마’였다. 무거운 짐을 옮길 때 쓰는 손수레로, 경상도에서는 구루마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 할머니의 손에서 컸던 나도 끌차라거나 수레로 부르지 않고 구루마라고 종종 불렀던 버릇이 어른이 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L자 모양인 구루마는 할머니 집에 있던 물건이었다. 2단 접이식의 형태로 키에 따라 높낮이의 변경도 가능했다. 주름과 검버섯이 수놓은 것처럼 많았던 할머니의 손에 이끌리던 구루마가 지금은 내 손에 잡히어 길을 떠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학생이 되고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구루마는 독특히 제 노릇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항상 구루마는 신발장 왼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지정석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공간에서 구루마는 짐짓 무게감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서 가면 있는 마트에서 생필품이나 음식을 사러 갈 때는 항상 구루마를 챙겼다. 덜덜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무엇을 만들어서 먹을지, 샴푸 향기로는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일이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에 물건을 구루마에 가득 싣고 온다면 편리했다. 어깨가 무겁지도 않고 끙끙거리며 봉투 두 개를 쥐고 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구루마는 강아지처럼 내 뒤를 묵묵히 따라왔다. 재잘거리지도 않고, 매일 신발장에서 본 모습 그대로 무게감 있게 말이다. 구루마가 할머니의 집에서 내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할머니가 살아 계셨지 않았으며 유품을 정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옷과 비녀, 장롱 속에 잠들어 있던 한복을 차례대로 봉투에 담던 찰나, 엄마가 말했다. “저 구루마는 어떻게 버려? 스티커 붙여서 내야만 하나…….” 구루마와 내가 눈을 마주한 순간 저것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장을 보고 올 때 구루마가 있으면 편할 것 같으니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엄마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함께 천안으로 올라가는 기차를 탔다. 그렇게 동거가 시작되었다. 구루마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할머니가 그려진다. 유치원에 다닐 때와 학생 때의 여름방학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있었다. 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면 나를 꼭 데려다가 꽈배기나 칼국수를 먹었던 기억도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시장의 분주한 소리와 생선 비린내, 달짝지근한 향기 속에서 구루마는 언제나 털털거리며 할머니의 손에 잡힌 채였다. 손잡이 이음새에 녹이 슬면 늘 똑같은 구루마를 샀고, 바퀴의 이가 나가면 철물점에 가서 교체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구루마에는 자신이 좋아하던 것보다 손녀가 좋아했기에 담은 장난감과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정류장에서 포석정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구루마를 뒤적거리며 빵이나 떡을 꺼내 주었다. 시장에 갈 때만이 아니라 냇가로 바람 쐬러 갈 때, 동네에서 순하다고 유명한 진돗개인 뭉순이를 보러 갈 때. 언제나 구루마는 할머니 곁에 있었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과일 맛 사탕 봉지를 그대로 싣고서. 가는 길에 사탕 껍질을 하나씩 까 주면 날름 받아먹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어쩐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퀴가 아스팔트 위를 지나는 소리, 구루마의 손잡이를 잡을 때,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담을 때 말이다. 할머니가 없는 비어버린 집이 야속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항상 앉아 있던 마당의 평상에서 “누가 왔노?” 외치며 대문을 열어주는 사람도, 마당에 고추 너는 거 도와달라며 애살맞은 목소리로 부탁하는 전화도 오지 않는다는 걸 빈집을 보고 체감했던 탓이었다. 어쩐지 나에게 많은 추억이 남은 것 같지 않았고 그저 다 타고 남은 재만 쥐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실체가 없는 그리움과 사랑은 어딘가 불안했다. 이대로 할머니를 잊고 살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웠다. 나의 손에 잡힌 구루마를 보면 이제 안다. 실체가 없어도 맘껏 사랑하고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을. 구루마를 보면 자연스레 백발의 여인이 발을 맞추어 걸어주는 풍경이 펼쳐진다. 때때로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며 덥지는 않냐, 춥지는 않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마음속 깊이 남은 온기와 걷고 있다 보면 여름의 볕이 더 뜨겁게 느껴지고 겨울의 한기는 잠잠해진다. 구루마를 꼭 잡은 손이 마치 누군가와 손을 맞잡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나 혼자 장도 보고 기특하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속으로 조용히 물어보면 옆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터덕터덕. 바퀴의 소음은 브레멘 음악대의 연주가 되고 나는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할머니와 함께 발소리를 맞추며. 구루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 이사할 때는 신발장이 넓은 집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오랫동안 함께 걷자는 말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