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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 1호선과 노인
⠀학교도 아니고 1호선이 그립다니.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지하철 1호선 라인에 있다. 바이러스로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학교 갈 일이 줄어버렸지만 1호선을 타면 늘 설렜고, 목적지가 학교가 아니어도 그랬다. 하행선을 탈 때면 내리자마자 곧장 강의실로 뛰어갈 수 있는 칸까지 걸어가는 게 습관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역에 내려보았고, 때로는 지하철 노선을 따라 자전거를 타며 앞질러 가는 1호선을 바라보기도 했다. 1호선이라는 이름값을 하느라 고생한 탓에 낡은 차체가 지하와 지상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모습이었다. ⠀1호선은 노선도에 그려진 짙은 남색 같다. 거의 언제나 만석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소음이 들리며 꼬릿한 냄새가 난다. 사람과 소리, 공기의 밀도가 빽빽이 들어차서 조금 오래 탔다 싶을 때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에선 열이 난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은근한 소주 냄새가 나면 혹시 몰라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최대한 강인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적지까지 주변을 경계하기도 한다. ⠀처음 대학에 입학해 술 게임이란 걸 접했을 때, 1호선은 ‘지하철 게임’의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했다. 지하철 노선을 하나 정해 역 이름을 하나씩 외치는 게임인데, 1호선은 엄청난 인기 노선이자 야유를 받는 노선이었다. 게임이 몇 바퀴 반복되면서 서울에 살지 않는 학생들도 주요한 역 이름을 금방 외워버린 탓에 게임이 도무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앞다퉈 자기가 어디서 출발해 무슨 역을 거쳐 오는지, 왜 청량리행이 등굣길을 망치는지, 어느 역에서 지연이 잦고 또 새벽에 어떤 취객의 싸움을 목격했는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면, 서로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던 사람들이 지옥의 1호선을 타고 다닌다는, 또는 곧 타고 다니게 될 거라는 공통분모 하나를 갖게 됐다. ⠀선배들의 불평과 인터넷에 떠도는 1호선 빌런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나는 1호선이 그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이미 일상 속에 익숙히 베인 탓도 있겠지만, 새내기 시절 언젠가에 목격한 낯선 이들의 대화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출근 시간이 막 지난 오전 즈음, 나는 하행선 1-1칸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고 앞에 앉은 할머니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염색한 검은 머리와 자란 지 조금 돼 보이는 연회색 뿌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할머니 바로 옆자리 승객이 내리고 곧 할머니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분이 자리했다. 그는 앉아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자신의 양 옆을 스캔하더니 내 앞에 앉은 할머니에게 대뜸 물었다. ⠀“어디, 제기동 가셔?” ⠀“어어, 청량리로 다니다가 그 너머로 가면 더 괜찮다고 어디서 그래 가지구, 글로 다닌 지 꽤 됐지.” ⠀대답한 자는 목적지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도 않는다. 대신에 말을 건 할머니의 두 손 가득한 짐을 보고 장바구니를 손수 뒤적이며 반문했다. ⠀“이거는, 겉절이 담그시게? 장을 뭐 이리 많이 봤어, 아침부터. 무는 실하네. 아직 가을도 안됐는데.” ⠀제기동과 청량리가 병원의 소재를 뜻한다는 건 몇 개월 동안 1호선 승객들의 대화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른 아침부터 장을 보는 할머니들이 많다는 것도.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공공연하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담소를 나누다가 맞은편에 자리가 나자 두 할머니는 당신들 앞에 서있던 나에게 말을 건다. ⠀“학생, 뒤에 자리 났어, 앉아서 가요.” ⠀스무 살의 나는 그 소란스럽고 다정한 오지랖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 작은 참견이 나에게는 너무 생소하고 재미있는 사건이었는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대화가 기억 한편에서 넘실댄다. 두 할머니의 진회색 머리카락, 채소가 담긴 장바구니, 창가 사이로 든 늦은 아침의 햇빛까지도 모두. ⠀이후에도 비슷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1호선에서 만났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 두 노인이 서로 휴대폰 너머 손주 사진을 자랑하다가 누구 한 명이 먼저 도착지에 다다른다. 그는 무심하게 일어나선 “그럼 들어가셔잉.”하곤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사라진다. 주무시는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쳐다보느라 정신없는 젊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다. 어느샌가 생긴 빈자리를 슬며시 가리키곤 다시 눈을 감는다. ⠀이제는 나도 여느 승객들처럼 웬만한 연착과 지연, 소음과 소란에는 큰 눈길을 주지 않을 만큼 노련한 1호선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나는 1호선에서 만나는 노인들을 계속 바라보게 된다. 요일과 시간을 불문하고 그들과 스쳐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시간의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일과를 보내기 위해 이 열차를 탔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혹여 산보 가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탔다면 그건 어떤 마음일는지. 겪어보지 않아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의 무게를 감히 가늠한다. ⠀느리고 둔감한 구석이 많은 나는 때때로 그들과 비슷한 속도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그들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 알아채기도 한다. 그들 덕분에 모르는 이에게도 건넬 수 있는 작은 친절과 짧은 한마디를 배운다. 그래서 다른 승객들을 지켜보고 오지랖을 부리는 그들을 계속 지켜보게 된다. ⠀ 만남을 배척하고 홀로 고립되어야 안전하다는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그들의 안녕이 궁금하다. 여전히 1호선에 몸을 싣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지, 혹시 안전히 칩거하고 있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할 때 다시 1호선으로 돌아올는지. 임효진│한국외국어대학교
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 저시살이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척박한 땅에 초록빛을 빼꼼히 드러낸 풀이 있다면 그건 쑥이다. 슬슬 이맘때쯤이면 할머니 밭에도 쑥이 자라고 있을 거다. 우리 집은 2~3주에 한 번은 꼭,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오랜 규칙이 있다. 민들레와 함께 쑥이 꿈틀대고 있는 지금, 이 시기를 놓쳐선 안 된다. 한 주라도 시간이 어긋났다간 쑥이 너무 어려서 먹을 게 없거나 혹은 너무 질겨서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적당한 날을 골라 쑥을 캐러 할머니 댁에 가야 한다. ⠀“아야, 지금 쑥이 참 보들보들하다.” ⠀할머니가 보낸 정보를 입수, 그 주 주말 우리 가족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할머니 댁으로 향한다. 매년 봄, 우리는 이렇게 타이밍을 맞춰 할머니의 비옥한 땅에서 알맞은 쑥을 골라온다. ⠀하지만 심각한 방안퉁수이던 유년 시절의 나는 쑥이 자라나는 3월을 두려워했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선생님, 모든 게 낯선 새 학기를 적응해내야 했기에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저녁부턴 늘 긴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챙겨주신 저시살이들을 바리바리 챙겨 집으로 돌아오는 일요일, 아마도 그날의 저녁 식탁에는 보나 마나 쑥국과 봄 제철 나물들이 올라올 거다. 주말 동안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고 있으면, 곧이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와서 쑥국 먹어~” ⠀역시나 오늘 저녁은 쑥국이다. ⠀향긋한 쑥과 약간의 흙 내음이 어우러진 구수한 쑥국을 맛본다. 봄의 맛이다. 아 이럴 수가, 혼란스럽다. 학교에 갈 내일을 생각하는 내 마음은 온통 심란한데 쑥국은 눈치 없게도 너무 맛있다. 입맛은 별로 없지만, 가뿐히 두 그릇을 해치운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나름의 핑계를 이유로 할머니 댁에 자주 따라가지 않던 나는 오랜만에 집에 와서 할머니가 보낸 쑥과 취나물 무침에 밥을 먹는다. 저시살이의 봄 내음이 순식간에 방안퉁수의 어릴 적 나를 소환시켰다. 혼란스럽던 봄의 그 맛이다. ⠀“엄마, 나 어릴 때 새학기에 적응을 못해서 매년 3월을 힘들게 보냈던 거 기억나? 이맘때쯤이면 꼭 할머니가 쑥 캐가라고 불러서 집에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는 늘 할머니가 챙겨준 저시살이로 엄마는 밥을 해서 우리를 먹였잖아, 내일 낯선 학교에서 날 어떻게 지켜낼까, 걱정하면서도 쑥국은 너무 맛있어서 꼭 두 그릇은 먹어야 했다니까? 굴하지 않고 두 그릇을 먹게 하고 수많은 월요일을 버티게 했던 힘이... 여기에 있었던 걸까?” ⠀“그래 맞아, 너 할머니가 봄마다 챙겨준 저시살이로 이만큼 큰 거야~” ⠀그렇구나. ‘밭에서 죽지 않고 겨울을 넘겨서 이른 봄에 먹을 수 있는 배추 따위의 채소’, 저시살이. 할머니는 그 뜻처럼 죽지 않고 겨울을 넘길 수 있는 가장 강한 봄의 힘을 우리가 담아낼 수 있도록, 매해 봄마다 할머니만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계셨다. 그 때문에 나는 봄마다 할머니가 챙겨준 저시살이들을 꼭꼭 씹어먹고, 새로운 세상을 두려워하던 연약한 몸에서 꿈을 담아낼 수 있는 단단한 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쑥이 지금 딱 먹기 좋게 자랐다. 이번 주에 내려올 거지?” ⠀“이번 주에는 유채 김치 담글 거야, 지금이 딱 제철이라 이번 주에 안 오면 못 먹어.” ⠀무엇이든 퍼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자 관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꾀어내기 위한 할머니의 귀여운 유인책이자 혼자 살고 있는 당신께서도 지켜보고 지켜달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2~3주에 한 번 할머니 댁에 가는 우리 집의 오래된 규칙이 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을 채워줄, 우리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저시살이’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저시살이를 통해 서로를 지키고 지켜보는 돌봄의 사랑을 수행하고 있었다. ⠀할머니 마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고 마을에 이사를 오는 사람도 없어 1인 가구가 부쩍 많아졌다. 옆집 할머니 그리고 그 옆집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자식들이 떠난 집에서 홀로 생활하신다. 어떤 할머니는 마당에서 놀고 있는 우리 세 자매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우리에게 슬그머니 옅은 웃음을 보내시고는 사라지신다. 인구 빈곤뿐만 아니라 정서적 빈곤도 함께 경험하고 있는 할머니의 마을에는 돌봄의 공백들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그도 그러한데, 현대사회의 개인화 현상이라든지,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과 같은, 서로를 돌봐줄 수 없는 이유도 함께 늘어나고 있어 마을에는 고독과 고립만이 넘쳐날 뿐이다. ⠀하지만 봄에는 늘, 겨울을 견뎌내고 생장한 기특한 채소들이 자라나는 법이다. 우리에겐 매년 서로에게 줄 ‘저시살이’가 있다. 우리 집은 할머니의 유인책과 ‘2-3주에 한 번 방문하기’라는 오래된 규칙으로 돌봄과 사랑의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저시살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다정한 마음들이 보호받았다. 외로움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는 방법은 이러한 사랑의 울타리를 엮고 엮어서 서로를 지키고 지켜보려는 다정함의 총량을 늘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외로운 사회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돌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들로 돌봄과 사랑의 울타리를 만들고, 길을 잃고 무수히 떠다니고 있는 외로움들을 울타리 안으로 가두어 성실히 지켜보고 지키는 일이다. ⠀올봄에도 할머니의 시그널을 받고 시골로 향한다. 이제는 먼저 물어보기로 하자. ⠀“할머니, 새 김치는 언제 담가? 이번 주에 가도 돼?” ⠀“지금 밭에 봄동이랑 자랐겠다! 이번 주에 내려갈게~” 황채린│전북대학교
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봄은 오지 않는다
⠀2012년 봄, 갓 18살이 된 나는 봉사점수를 채우기 위해 의정부에 위치한 한 보육원을 찾았다. 보육원 교사는 “고등학생은 절대 봉사 신청을 받지 않지만, 같이 온 친구 A가 이곳 보육원 출신이어서 허락했다.”고 연신 강조했다. 함께 등교하고, 점심을 먹고,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기도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보냈던 A가 보육원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은 최근에 안 사실이었다.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는 졸업 전에 반드시 봉사활동 점수를 채워야 했는데, 어디서 봉사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편하게 쉴 수도,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할 수도 있었다. 사서 고생하기 싫었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그때 A가 불쑥 보육원 봉사를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보육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내게 A는 어릴 적 보육원에서 잠시 지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도.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왔던 A였기에 내심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자고 답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안내에 따라 사무실에 들어서자 수많은 중년 여성의 봉사자들이 우리를 반겼다. 보육원에서 자란 A가 훗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도우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대견해했다. A 덕분에 맛있는 간식과 음료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잡초를 뽑으며 헥헥거렸던 여타 봉사활동과 비교하면 정말 ‘꿀’같은 봉사였다. ⠀우리는 주말마다 보육원에 방문해 빨랫감을 개고, 간간이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놀았다. 단 하나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있었다면, 보육원에 입장하기 전 모든 디지털 기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육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디지털 기기를 보여줘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될 것을 우려한 조치인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보육원은 유치원생 아이들과 초등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는 3번 넘게 파양된 아이들도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편의점에서 몰래 간식을 사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어린아이들이 우리를 잘 따랐다. 하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유 없이 유독 나를 싫어하는 12살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짜증을 내며 피했다. 봉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육원 아이들과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꽤나 마음고생을 했다. ⠀그런데 봉사활동 마지막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내게 이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언니, 하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드디어 마음을 열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언니 핸드폰 하는 거 봤어요. 저 한 번만 쓰게 해주세요.” ⠀몰래 보육원에 핸드폰을 반입한 사실을 들켰다는 걸 알자마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를 관계자가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혼이 날 터였다. 봉사활동 마지막 날이라고 풀어졌던 나 자신을 탓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나는 침을 꼴딱 삼키고 재차 안 된다고 말했다. ⠀“언니, 제발요. 정말 한 번만. 딱 한 번만 빌려주세요. 잠깐이면 돼요.” ⠀보육원 교사가 절대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던 모습이 떠올라 난감했다. 하지만 나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아이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부탁하니 오죽하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핸드폰을 가지고 구석으로 간 아이는 문자를 보내는 듯했다. 나는 혹여나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올까 초조한 마음으로 연신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만하면 됐으니 빨리 핸드폰을 달라고 말할 찰나에 아이가 말없이 핸드폰을 넘겼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켰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 흔적이 보였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호기심에 최근 보낸 문자함을 확인했다. ⠀‘엄마, 나 솔이야. 내가 잘 할게. 앞으로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을게. 청소도 잘 하고, 엄마 귀찮게 안 할게. 제발 나 좀 데리러 와줘’ ⠀나는 가만히 서서 문자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안일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아이들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들에게 거울 같은 존재였다. 내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봉사를 나올 때, 그들은 식판을 들고 밥을 배급받았다. 내가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자고 싶다고 투정을 부릴 때,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사실상 또래나 마찬가지인 내가 봉사를 한답시고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 때마다 그들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고 삼켜내야 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보육원 아이들’에 대한 이미지를 멋대로 재단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역경을 딛고 씩씩하고, 해맑게 자라는 아이들일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심술궂을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내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서 보육원을 떠나는 내내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못했다. ⠀“벌써 봄이네.” ⠀보육원을 나온 A가 말했다. 동네 하천을 따라서 심어진 벚나무가 벌써 만개했다. 바람이 불면 수많은 꽃잎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때 산책을 나왔는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머금은 한 가족이 유모차를 이끌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주머니에 담긴 핸드폰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아직 봄은 안 온 것 같아.”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받은 메시지함의 알람은 0건이었다 육해영│서울예술대학교
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노을로 남아서
⠀노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모든 것을 안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연해지는 때가 있다. 나는 노을을 삶들로 빚어진 하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인생은 흙으로 가고, 그래서 흙은 인생이었다. 바람 불면 흩어질 인생은 무수한 입자가 되어 하늘에 날린다. 그러면 비로소 인생은 빛에 닿아, 산란하며 진한 노을로 그려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잠들어 계실 촉촉한 흙을 어루만지며 떠올렸다. 어쩌면 이미 노을의 한 부분이 되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슬픔은 무뎌지나, 노을을 볼 때면 가슴 한편에 애정이 살아있음을, 아니 더욱 부풀어감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2주간 의식불명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 무렵이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가장 편안한 때였을 것이다. 의식이 있었을 때는 병문안을 가는 발걸음마다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까 가늠이 서질 않았다. 좀먹는 고통으로 몸을 배배 꼬는 것을 볼 때면, 누군가 나의 정신을 꽉 움켜쥐는 느낌을 받곤 했다. 나에게는 기도만이 유일한 방도였다. 나의 입술을 어머니의 귓불에 댄 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님은 병자를 보고서 결코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다고, 어머니에게 찰나의 온전한 정신을 허락해달라고. 그 순간들은 기적을 바라는 믿음의 시간이었으나 나를 위한 잠시의 휴식이기도 했다. 그때만은 고요한 쉼을 누릴 수가 있었다. ⠀나의 기도는 허상의 세계로 침전되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의 입 속으로 붉게 익은 딸기를 넣어주려는데 갑자기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내 눈앞에 번졌다. 정말 고운 표정이었다. 당시 어머니의 암은 전신에 퍼진 상태였다. 끝내 머리까지 이어진 암의 줄기에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곤 하셨다. 그날도 나의 이름을 기억하시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고는 빈약한 손을 내밀어 내 입 속으로 딸기를 한 번에 두 개나 넣어 주시곤 한참 나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으셨다. 나는 일순간 정신이 저릿함을 느꼈다. 당신의 모든 추억들은 증발해 사라져도, 어째서 사랑할 줄 아는 기억만은 끝까지 남아 나의 마음을 이리도 적시는지.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을 걸으며 쉴 새 없는 눈물과 함께 무언의 감사를 하늘로 올려 보냈다. ⠀학교를 마친 후였다. 갑자기 선생님께서 나를 차에 태우시고는 말없이 어딘가로 향하셨다. 운전대에 앉아 울먹이시는 선생님을 보니 침묵도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직감적으로 차가 병원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슴 양쪽이 중력을 견디지 못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로 밀쳐내고 싶은 미래가 이제는 받아들이라며 현재의 나를 재촉했다. 병원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동안 내게 딸기를 먹여 주신 그 수수한 얼굴을 떠올렸다. ⠀해 질 무렵 어머니의 마지막 호흡이 다했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고 10초가 지나지 않아, 심박동기의 그래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늦어버린 것은 아니었음에 은연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임종을 지켜드린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나의 발걸음을 기다려 주셨다. 아버지는 내게 ‘너를 보고 나서 떠나고 싶으셨던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은 뒤 슬픔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이 미치도록 답답했지만, 한탄으로 미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서서히 차가워져 가는 그 모습에서도 진득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음에 형용 못할 감사가 벅차 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한 명씩 병실로 들어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꺼내 놓는 시간이 주어졌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청각은 얼마 동안 살아있기 때문에 하는 하나의 의례였다. 나는 마지막 차례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보니 차가운 부드러움이 온 신경에 와 닿았다. 할 말을 찾으려 과거의 온갖 기억들을 들춰내도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단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감사하다고, 그리고 또 감사하다고. 몇 번을 거듭해 속삭였다. 단전으로부터 오르는 진심이었다. 나는 기도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찬송가의 노랫말을 따뜻한 입김에 얹혀 보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어머니가 자주 흥얼거리시던 가사였다. ⠀나는 하늘나라에서의 재회를 약속하고서 병실을 나섰다. ⠀모든 인생 속에는 통증의 시간들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때문에 이 통증의 과정 속에 놓인 생명들은 때때로 세상을 향해 증오의 마음을 키우곤 한다. 나 또한 견디기 버거운 나날들 속에서 심장 내부로 타들어가는 나 자신의 아우성을 들은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픔의 시간 속에서 조차 평온할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은 누군가의 애정으로 말미암는 축복이자, 세상이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화해의 손길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생 속에 감춰두신 듯하다. ⠀나도 이제 스스로의 손으로 모든 일을 헤쳐 나가야 할 성인이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피부로 느껴보니 역시나 싶나. 나아가는 길에 지치는 때면 고개가 노을을 찾아간다. ⠀그곳엔 무수한 삶의 조각들이 날린다. 누군가의 못다 마친 목소리가 있고, 더 깊이 품어주지 못해 뒤늦게야 전하는 진심이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붓으로 그은 듯이 한데 모여 푸른 공백의 하늘을 메운다. ⠀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말을 건넨다. 지친 맘 한번쯤은 쉬다 가라며. 노을에 시선이 머무를 때 느낄 수 있는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함. 그곳은 따뜻한 품 속인 듯하다. ⠀나는 묘소 앞에 서 본다. 익숙함도 더디 오는 일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다소 일찍 아로새겨진 이름에 울컥하는 때도 있지만, 내 마음은 항상 자유롭다. 언제부터인가 대표 기도는 나의 몫이 되었다. 조금은 부끄럽지만 최대한 차분히 목소리를 내어본다. 감사로 시작해 감사로 마무리 되는 기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의 방식이다. 김대한│서일대학교
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거북이들의 마라톤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느렸다. 걸음마를 떼고, 처음 말을 하고 글자를 쓰는 것 등 모든 것이 느렸다. 내게 혹여나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웠던 어머니께서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셨다. 의사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머님, 따님은 조금 느린 아이입니다. 어머님이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병원을 나온 후 시작되었다. 거북이와, 그런 거북이를 평생 지켜봐야 하는 엄마 거북이의 마라톤이. ⠀나에게는 오빠와 동생이 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뭐든 빨리 배우던 형제들과 달리 나는 잘하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게 잘하는 것을 찾아주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배우게 해주셨다. 리듬체조, 수영 등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난 그 어느 것도 잘 해내지 못했다. 몇 달을 배워도 키즈풀을 벗어나지 못하던 나를 지켜보던 선생님께선 결국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어머니 수영을 더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차라리 다른 운동을 시켜보세요.” ⠀선생님께서는 줄넘기를 배워보라고 하셨고 그렇게 나는 줄넘기를 시작했다. ⠀줄을 넘는 것은 거북이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줄넘기 수업에서도 항상 뒷줄 꼴찌에 있었고 내겐 익숙한 자리였기에 그리 큰 절망감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오고 그 친구들이 나를 앞서는 과정을 반복했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자존심 혹은 오기였을 것이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내게 일어났다. 나도 맨 앞에서 줄을 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끝없이 줄을 넘기 시작했다. 줄은 매번 내 발에 부딪히며 멈추었다. 그래도 나는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나는 맨 앞줄에 가지 못했다. 맨 앞줄에 있는 친구들은 이단 뛰기까지 성공하였기에 나의 발전은 크게 눈에 띄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짐했다. 나도 이단 뛰기를 해야겠다고. 그날부터 매일 연습했다. 줄이 없을 때는 줄이 있다고 상상하며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빠른 줄이 내 발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단 뛰기를 멋지게 해낸 것이다. 한 번, 두 번 개수를 세어가며 넘던 줄들은 어느새 1000개를 넘겼다. 그렇게 나는 발전된 실력과 함께 초등학교 줄넘기 대회에 도전하게 됐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나는 입상하지 못했다. 내가 1000개를 겨우 넘는 동안 누군가는 2000개를 가뿐히 넘고 있던 것이다. 어릴 적 느낀 선천적 재능의 차이는 내게는 조금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거북이가 아무리 뛰어도 토끼 걸음의 반조차 따라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거북이를 지켜보던 엄마 거북이는 연거푸 잘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오늘 네가 1등이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와 줄넘기도 수영처럼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나, 둘 포기하다 보면 평생 결승선을 넘어보는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거북이는 자신을 두려움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다시 줄을 잡았다. ‘토끼, 네가 2000개를 넘는다면 나는 3000개를 넘을 거야.’ 그렇게 거북이는 남들보다는 느리지만,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다시 줄을 넘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나는 초등학교에서 줄넘기로 점점 유명해졌다. 줄넘기 대회에서 등수에 들기 시작하며 수업 앞줄을 넘어서 대회 앞줄에 서기 시작했다. 2012년, 덥지만 서서히 날씨가 식어가던 늦여름, 거북이는 수많은 친구를 제치고 마침내 최종 2인에 들었다. 모두가 숨죽이기 시작했고 대회장에는 나와 경쟁자 친구의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그렇게 계속 줄을 넘어가다 ‘탁’하며 걸리는 소리가 났다. 나 또는 친구, 둘 중 한 명은 줄에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옆을 돌아보니 친구는 달리기를 멈추었고 내 눈앞에는 결승선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였다. 마침내 골인, 날 향해 수많은 친구와 선생님들이 뛰어왔다. 모두의 축하와 응원 속에 거북이는 오랫동안 껍질 속에 숨겨두었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거북이는 아기 거북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거북이가 1등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기 거북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엄마 거북이는 자신이 지켜주던 아기 거북이의 손을 놓았다. 이제 아기 거북이를 바다로 보내줄 차례였다. ⠀거북이의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친구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 거북이는 항상 시작에 뒤처졌다. 열심히 뛰다 앞을 보면 먼저 빠르게 뛰어가는 친구들의 등이 보였다. 이런 경험들은 매번 상처로 다가왔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안다. 그 누구보다 단단한 등껍질을 입고 끝까지 달린다. 그러다 보면 나보다 먼저 뛰어가던 친구들의 속도가 하나둘 느려지고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거북이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린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넘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이 아팠다. 상처는 점점 곪고 흉터는 짙어졌다. 그러나 상처가 날 삼키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랑하는 나를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어린시절의 내가 그랬듯 넘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결국 난 1년 뒤 마라톤을 완주해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자신의 아기 거북이가 다시 뛸 수 있을 때까지 지켜봐야 했다. 엄마 거북이는 어릴 적처럼 직접 지켜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딸이 넘어가는 고개마다 쭉 지켜봐 주셨고 응원해주셨다. ⠀20대인 내겐 아직 많은 마라톤이 남아있다. 아마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힘들고 멀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런 달리기 속에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빛을 향해 갈 수 있게 나 자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어머니도 앞으로도 평생을 지켜봐 주실 것이다. 진은솔│한양대학교
2021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씹던 껌
⠀나는 껌 씹는 것을 좋아한다. 텁텁한 입을 달래줘서 좋아하고 심심한 입을 달래줘서 좋아한다. 근데 싫어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단물 빠진 껌’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도, 성인이 된 지금도, 몇 번 씹지도 않은 껌을 포장지에 뱉어버리는 것이 습관이다. ⠀어렸을 적에 내가 껌을 씹다가 뱉을 종이가 없어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있을 때면, 할아버지는 종종 내가 씹던 껌을 가져가 다시 씹곤 하셨다. 고작 몇 번 씹었다고 그새 단물이 다 빠져버린 껌을 뱉고 싶어 하는 눈치면,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주셨다. ⠀“할아버지, 안 더러워?” ⠀“네가 씹던 껌인데 뭐가 더러워. 하나도 안 더럽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단물 빠진 껌 좋아해.” ⠀내가 씹던 껌이 더럽지 않냐는 물음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나는 생각했다. 아, 할아버지는 날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어렸지만 알 수 있었다. 더럽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지만, 단물 빠진 껌을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란 걸. 단물 쏙 빠진 딱딱한 껌을 누가 좋아할까. 그건 그냥 손녀딸을 위한 할아버지의 착한 거짓말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난 더 확신했다. ‘할아버지는 날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하고 말이다. 고작 씹던 껌을 대신 씹어주는 게 무슨 사랑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게 사랑이었다. 단물이 다 빠져 딱딱하고 맛없어진 껌을 대신 씹어주는 것. ⠀견과류를 못 먹는 내가 월드콘을 먹고 싶어 할 때면,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 위에 얹어진 견과류만 골라 드시고 다시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곤 하셨다. 먹기 싫은 반찬을 엄마 몰래 할아버지 그릇에 슬쩍 덜어내면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덜어낸 반찬을 대신 드시곤 하셨다. 그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참 본능에 충실한 철없고 깜찍한 어린이였구나 싶다. 그땐 그냥 먹기 싫은 걸 먹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내가 싫어하는 걸 할아버지가 대신해 주는 게 좋았고, 그게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애정이란 걸 알아서 더 좋았다. 그런 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건네 주는 사랑은 늘 넘쳐흘렀고,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가 주는 방패 같은 사랑 속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의 방패와도 같은 사랑은 엄마에게 혼난 날에는 날 위로해 주기도 했고, 시험을 잘 본 날엔 기쁨을 함께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내가 아플 땐 나보다 더 아파해주기도 했다. 그러니 나한테 그 방패는 나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주고 지켜봐 주는 무적 같았다. 내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의 손에 주름이 하나 둘씩 늘어가던 그 순간에도, 할아버지의 사랑은 늘 나를 향해 있었고 나에게 단단하고 커다란 방패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어떤 날카로운 칼이 날아와도 뚫릴 것 같지 않던 단단한 방패는 얼마 가지 않아 약해지고 허물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하얗게 쌓여 있던 눈을 빨갛게 물들인 날, 그날 즈음부터였나.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매일같이 나와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서 있는 시간보다 가만히 누워 멍하니 계시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내가 덜어낸 반찬을 아무 말없이 가져가 주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숟가락 들 힘이 없어 혼자선 식사도 제대로 하시지 못했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만큼, 할아버지는 혼자서 못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맘때쯤 할아버지는 식사하는 걸 참 싫어하셨다. 늘 입맛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한두 숟갈만 드셔도 금세 안 먹겠다고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일상이었다. 할아버지가 유난히 입을 열지 않으실 때면 엄마도, 할머니도, 간병인 아주머니도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손녀딸 찬스였다. ⠀“할아버지 나 팔 떨어진다~ 딱 두 수저만 더 드셔. 응?” ⠀내가 괜히 팔 떨어진다고 투덜대며 밥을 국물에 적시고 반찬을 올려서 입 앞에 가져다 놓으면 할아버지는 결국엔 입을 여셨다. 난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먹기 싫지만 내가 원하니까 못 이기는 척 받아 드시는 것. 난 할아버지가 더는 수저 들 힘이 남아있지 않던 그때조차도 할아버지가 주는 사랑 속에서 자라고 있던 것이다. 다 허물어진 방패였지만 할아버지의 단단한 사랑은 나에게 안식처였고, 내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나한테 늘 방패가 되어주던 할아버지는 이제 없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할아버지 얼굴이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고, 영상을 틀지 않으면 할아버지 목소리가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실에 마음 한쪽이 욱신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전에는 할아버지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눈물이 났었는데 이젠 가족들과 친구들과 웃으면서 할아버지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할아버지는 그런데도 여전히 내 옆에, 그리고 내 안에 있기도 하다. ⠀나는 사랑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씹던 껌을 대신 씹어주는, 먹기 싫지만, 결국엔 입을 열어주는 그런 할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린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그런 자질구레한, 별거 없는 것들이 사랑이다. 나는 살면서 그게 사람이던, 물건이던, 형체가 없는 어떠한 것이던,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사랑할 테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늘 내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정민아│중앙대학교